보람을 느낀 일년

2009.09.11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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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람을 느낀 일년1)


1. 마침내 독일 땅을 밟다


나는 지난 해 9월 1일 오후 2시에 대한항공편으로 김포공항을 떠났다.

우리나라 동해를 거슬러 시베리아를 거쳐 가는 동안 밤인데도 내내 백야현상이 계속되었다. 처음으로 찾아가는 유럽속의 독일인지라 가슴이 설레고 흥분되었다.

마침내 같은 날 저녁 7시경에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루프트한자 창구에 가서 뮌스터행 탑승창구를 물어보았다. 「Halle C」를 따라가라고 하였다.


 간단한 여권 검사를 마치고 뮌스터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숨박꼭질 하듯 여러 곳을 꺾어 돌아가며 한참 후에야 뮌스터행 비행기탑승창구에 다다랐다.

탑승절차를 마치고 뮌스터행 비행기에 타고 기다리니 이 비행기는 정확하게 밤 9시 30분에 이륙하였다. 기내에서 빵과 음료수가 나왔다. 빵이 하도 짜서 절반만 먹고 남겼다.

바로 옆좌석에 앉은 승객에게 「뮌스터까지 얼마 정도 걸리는지」물어 보았다. 친절하게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가르쳐 주었다.

한 시간 후인 밤 10시 30분경에 뮌스터/오스나부뤽 공항(FMO)에 도착하였다.

한국에서 미리 연락이 된 친지 두 사람이 마중을 나왔다. 이들의 안내로 초청교수 콜호서 교수가 얻어 놓은 기숙사로 갔다.

콜호서 교수는 나의 일정이 도중에 변경되는 통에 파리에 가느라고 마중을 나오지 못하였다. 사실은 8월 27일에 뮌스터에 갈 것으로 편지를 하였으나 기숙사 방이 9월 1일부터 비로소 사용가능하다고 하여 일정을 9월 1일로 변경하였다. 여행용 가방 속에 든 김치 등을 들고 호텔에 묵다가 다시 기숙사로 옮기는 것도 번거롭고 하여 생각을 바꾼 것이다.


내가 거처할 방은 간이 샤워장이 딸린 화장실 한 개와 조그만 책상 한 개, 침대 한 개, 옷장 한 개, 싱크대 바로 아래에 딸린 조그만 냉장고와 바로 위에 붙은 조그만 벽장이 설치된 부엌이 갖추어진 조그만 방이었다. 혼자 생활할 수 있게끔 꾸며져 있었다. 냉장고에는 며칠 먹을 수 있는 빵과 치즈, 쥬스, 과일 등이 넣어져 있었다. 콜호서교수가 여비서를 시켜 미리 준비해 놓았던 것 같다. 책상 위에는 연구소위치를 표시한 뮌스터 시가지지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도보로 연구소까지 약 30분정도 걸릴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콜호서교수의 인사편지와 함께.

다음 날 시가지 지도를 보면서 기숙사 부근에 있는 「아제」호수를 따라 도보로 연구소에 갔다. 콜호서 교수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면담 후 연구소 끝 쪽 계단까지 친히 전송해주는 파격적인 친절함을 보여주었다.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던 「독일인은 차다」는 일반적인 인상이 지워지는 순간이었다.

 콜호서교수는 내가 독일에 오기 전에 나에게 약속한대로 연구실 하나와 연구 조교 한 명을 배정 해주었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시내에서 간단한 생활용품을 구입하였다.

거리마다 창문 가장자리에 화분을 놓아두거나 걸어두어 참 인상적이었다.

거리가 비슷비슷하여 한 동안 방향감각을 잃었다. 길을 물어보면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뮌스터는 시민이 약 27만 명, 대학생이 약 4만 명 정도 되는 「대학도시」이다.

독일에서 세 번째로 큰 대학도시라고 한다. 뮌스터는 시민들의 교양이 높고, 분위기가 차분한 아름다운 교육도시이다. 뮌스터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학생들의 공식등록숫자는 금년 3월말 현재 250명이라고 한다.


2. 진지한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9월 3일부터 본격적으로 연구실로 출근하면서 법대 세미나실에 소장된 자료들을 우선 개괄적으로 훑어보았다. 필요한 기초조사를 한 후 월별 일정표대로 시간활용을 하였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주말에 페어덴에 살고 있는 사돈집에 가서 쉬면서 영양보충을 한 후 사돈 아주머니가 담아준 김치 등을 얻어왔다.

처음에는 모든 음식이 느끼하고 기름에 튀긴 고기 종류여서 고역이었다.

생존을 위해 맛에 관계없이 먹었다. 한 달 정도 지나니까 그런대로 음식이나 생활에 적응이 되었다. 페어덴에 가지 않을 때는 라인강변을 따라 다니는 독일 고속열차 ‘이체(IC: Inter City)'를 타고 프랑크푸르트나 하이델베르크 등에 가 보곤 하였다.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도 있었으나 쉽게 빨리 극복하였다. 나의 조교인 만프레드라는 박사학위과정 학생이 처음으로 사과나 바나나, 커피 등 먹을 것과 마실 것을 혼자 가지고 와서 내 옆에서 먹고 있을 때 참 고약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얼마 후에 「여기는 독일이니 내가 독일 생활방식대로 따라야 하겠지만, 너도 나라는 한국인 교수를 만났으니 한국의 음식문화를 알아두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해주고 시범을 보여주었다. 맛있는 바나나를 사가지고 와서 「한국에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서로 나누어 먹는다. 너도 한 번 먹어봐라」. 가끔 점심도 사주고, 과일도 사주었다. 그러나 이것이 학생인 그에게는 부담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식당에 갈 때는 언제나 내 앞에 서라. 네 음식 값은 네가 지불하라」고 일러주었다. 나하고 생활하면서 한국식 인사법도 배우고 과일 등을 가끔 줄줄도 알게 되었다.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뮌스터대 신문방송학과에서 논문을 쓰고 있는 경남대 신문방송학과 박 교수라는 분이 어느 날 내 연구실에 우연히 들렀다가 만프레드가 하도 한국식인사를 잘하니까「언제 저렇게 조교훈련을 잘 시켜 놓았느냐」고 농담을 하였다.

만프레드는 한국인인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내가 만일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 온 교수였다면 별 흥미가 없었을 것이다.

 만프레드를 통해서 나는 독일에서 지도교수와 학생이 어떤 관계에 있고, 어떻게 지도를 받는가를 자세히 관찰하고 알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매주 수요일 12시에 이삼십 분 정도 열세명의 박사학위과정에 있는 연구원들이 연구소장인 콜호서 교수 연구실에 모여 협의회를 가졌다. 나는 매주 직접 참여함으로써 독일 법과대학의 연구소 분위기와 사제지간의 관계를 상세하게 관찰하고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 나이로 60세인 콜호서 교수는 ‘사회법․노동법․경제법연구소’외에 ‘보험본질 문제연구소’를 같이 운영하면서 명실 공히 생산적인 학문 활동을 하였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눈코 뜰 새 없이 항상 바빴다. 논문을 쓰고, 독일민법 코멘타 개정판을 집필하고, 주기적인 연구소주관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학술대회를 할 때마다 참석해 보았는데 발표자의 발표가 끝나면 참석자 대부분이 책상에 손가락 끝으로 두들겼다. 처음에는 강의 내용이 지루해서 야유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감사하고 애썼다는 뜻으로 그렇게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학술대회를 할 때는 참여자가 항상 정장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의라고 하였다.

연구소장은 C4 교수만이 된다. 독일에는 ‘독일 연방봉급 법률(Bundesbesoldungsgesetz)’에서 교수의 직급을 C2,C3,C4로 규정하고 있다.

조교는 C1에 해당한다. 독일에서 교수자격(Habilitation)을 얻으면 C2나 C3 직급의 교수로 초빙 임명된다. 승진하기 위해서 서독지역 교수들이 동독지역 대학으로 대거 이동하였다.

연구소장에게는 여비서 한 명을 배정해 준다. 여비서의 월급은 지방 정부에서 지급한다고 한다. 얼핏 생각하면 여비서를 한 명 주니까 그냥 좋을 것 같지만 연구소장인 교수가 부지런해야만 여비서에게 일감을 계속 줄 수가 있을 것이므로 연구소장의 자리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일에서는 대학교수 되기가 쉽지도 않지만, 일단 교수가 되면 특히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다. 지엽적인 것이지만 교수가 호텔에 숙박하면 숙박비를 할인해준다. 지난 해 12월 하순경에 ‘쿨핑호텔’에 예약을 했더니 할인한 숙박료로 비용견적을 내주었다. 대학을 그만 두고 직장을 옮기더라도 교수 칭호는 그대로 따라 다닌다. 독일 기민당(CDU)을 창당한 아데나워가 자기 비명에 교수 칭호를 쓰도록 했다는 유명한 일화는 이를 잘 말해 준다.

연구소장인 지도교수와 연구원인 박사학위과정 학생들은 철저한 도제관계에서 지도를 하고 지도를 받았다. 연구원들은 아주 진지하고 차분하게 열심히 연구를 하였다.

그들은 자유로우면서도 지도교수(Doktorvater : 박사아버지)인 연구소장을 존경하고 그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었다.

콜호서 교수의 경우 두 명의 핵심 연구원(Mitarbeiter)의 도움으로 저서나 코멘타의 집필이나 개정판 작업이 행해졌다. 독일에서는 이들 핵심 연구원과 기타 연구원들이 있기 때문에 부지런한 교수의 경우 일 년에 열권 정도의 저서도 출판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콜호서 교수의 경우 여비서와 여자판사인 핵심 연구원의 도움으로 학생들의 수강신청이 이루어졌다. 레포트의 지도와 채점은 여자판사인 핵심 연구원의 책임 하에 처리되었다.

연구원이면서 학생조교 역할을 맡는 사람도 있었다. 독일대학에는 우리 식의 학과개념이 없다. 굳이 따진다면 연구소가 그 기능 일부를 떠맡고 있다고 하겠다.

연구원들은 세미나실을 비롯하여 어느 방이나 출입할 수 있는 만능 키를 가지고 있었다.

밤늦게라도 급하게 자료를 볼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들어가서 볼 수 있다. 세심한 점에서부터 학문할 수 있는 분위기가 배려되어 있었다. 독일인들은 원칙적으로 공사가 분명하고 정직하기 때문에 상호간에 신뢰관계형성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여기에는 학사나 석사제도가 없고 법률가양성시험인 제1차, 제2차 국가시험합격이 이에 갈음하는 기능을 한다. 연구원이 되려면 적어도 제1차 시험은 합격하여야 한다. 연구원이 되면 박사학위과정에 적을 둘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독일 법과대학의 교육은 ‘법률가양성법(Juristenausbildungsgesetz)에 따라 직업교육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국가시험은 고등법원에 설치된 국가시험위원회에서 관장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일 년에 한 번만 시험응시 기회를 주지만, 독일에서는 15회 이상의 시험기회를 제공하였다. 시험은 법원건물에서 치러진다.

구체적으로 법과대학 졸업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1학기부터 제6학기까지는 강의를 듣고, 3학기는 반복을 한다. 그리고 제1차 국가시험을 본다. 제1차 시험에 합격하면 2년 동안 실무수습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사람을 ‘법률가시보’(Referendariat)라고 한다. 제2차 시험에 합격하여 판사나 검사발령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사법관 시보’(Assessor)라고 한다.

제1차 국가시험은 법과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후 세과목의 필기시험(Klausuren)과 6주이내에 작성한 논문(Hausaufgabe)제출, 구두시험으로 이루어진다.

총점에서 ‘mangelhaft'를 받으면 불합격된다.

점수단계는 아래에서부터 mangelhaftausreichend → befriedigend → vollbefriedigend → gut → sehr gut(18점)으로 분류된다.

제2차 국가시험은 법원, 변호사사무실, 행정관청에서 실무수습을 거친 후 시험을 보며, 성적순에 따라 발령을 낸다.

 우리나라에서 온 유학생이 법과대학 박사학위과정에 적을 두려면 지도교수가 정하는 일정한 과목을 수강하여야 한다. 그것은 우리나라에 독일과 같은 국가시험제도가 없으므로 실력수준을 공인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박사학위 청구논문 심사용 논문제출시기는 전적으로 지도교수의 판단에 따른다. 지도교수가 논문심사용 논문 제출을 내부적으로 승낙하면 그 해당학생은 세 명의 구두시험위원을 지정하고 학장에게 공식 신청한다.

논문심사는 지도교수를 포함한 세 명의 심사위원이 심사를 한다. 논문심사에 합격하더라도 구두시험에 불합격하면 일 년여 뒤에 다시 구두시험을 치러야 한다.

 실제로 지난 해 말에 한 한국인 학생이 심사용 박사학위 청구 논문을 제출하고 논문심사도 끝나서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될 줄 알고 한국에 직장을 구해놓고 뮌스터에 임대로 살던 집까지 다 정리하고 출국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들떠 있는데 구두시험에서 운 나쁘게도 불합격한 예가 있었다. 한국 같으면 논문심사에 합격했으면 대체로 구두시험은 통과시켜주는 것이 보통이나 독일에서는 공사가 분명하기 때문에 사적으로 아무리 친하더라도 공적인 점에서 문제가 있으면 절대로 봐주지 않는다. 훌륭한 학자를 키운다는 점에서는 독일 교수들의 태도가 일리 있다고 본다. 해당 본인도 불합격당할 때는 서운하고 씁쓸하겠지만, 대학 강단에서 교수로서, 학자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철저하게 검증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독일사회가 원칙적으로 부정이 없고 질서가 안정된 것은 모든 영역에서 각자가 맡은 일을 성실하게 처리하고 공사를 분명히 하기 때문일 것이다. 권한을 넘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

원칙에 어긋나면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다. 한 번 안 되는 것은 끝까지 안 된다. 독일가정에서 하는 자녀교육도 마찬가지다. 만일 우리 사회에서 원칙을 끝까지 고수하면 그 사람은 꽉 막힌 사람이고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으로 매도당하기 십상일 것이다.

 독일에서는 교수가 정년퇴임을 하게 되면 고별강연을 한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강연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싼드록(Sandrock)이라는 국제거래법 교수 정년퇴임 고별강연회가 지난 2월 3일 쉴로스(Schloβ : 옛날 영주가 쓰던 성인데 지금은 본부 건물로 사용) 아울라(Aula : 대강당)에서 있었다. 고별강연회 후 싼드록 교수 주관으로 하객들에게 점심을 대접하였다. 음식탁자마다 각 나라 수도가 표시된 안내표와 조그만 국기가 놓여져 있었다.

나는 서울이 표시된 탁자에 앉았다.

삼사백명 하객 앞에서 싼드록교수는 나를 소개해 주었다.

콜호서교수는 서울에서 온 싼드록교수 제자인 나이든 모 교수에게 나를 아주 좋게 이야기 해주었다.「박교수는 독일어도 잘하고, 한국에 가면 책도 낼 것」이라고.


3. 강의실풍경․세미나실


 이 곳 뮌스턴대 법대는 재학생이 약6000명 정도이고, 겨울학기에 700명, 여름학기에 400명 정도가 입학한다고 한다. 뮌스터대학에서는 법과대학이 제일 규모가 크고, 다음이 경영대학 ․ 신학대학이다.

뮌스터대학 처럼 전통적인 대학도시의 경우는 강의실 사정이 좋지 않아 대형 강의실에서 6,700명 정도의 학생을 앉혀 놓고 마이크 강의를 한다.

한스 브록스(Hansbrox)같은 정평이 나있는 교수의 강의시간에는 앞쪽 교단 옆까지 와서 쭈그리고 앉아서 강의를 경청한다. 한스 브룩스 교수는 우리나라에도 알려진 유명한 교수인데 지난 해 가을학기에는 독일 가족법 강의를 하였다.

 이 교수는 금년에 72세이다. 유머가 풍부하여 강의시간 내내 학생들의 웃음소리로 가득찼다. 한스 브록스 교수는 동료교수인 내가 자기 강의를 듣고 있다니까 굉장히 기뻐하였다.

독일에서는 본인이 원하면 정년퇴임 후라도 연구실을 보유하면서 강의를 할 수가 있다.

강의를 잘하는 교수 시간에는 분위기가 좋고 수강생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강의 도중에 학생들이 들락거리는 등 분위기가 산만하였다.

뮌스터대 법대는 교수진도 쟁쟁하고, 학생들도 우수하지만 강의실 여건이 좋지 않은 것이 안타까웠다. 학생들은 졸업하고도 법대교수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학생들이 많았다.

수강생이 많은데다 자기가 필요한 강의만을 듣고 그 교수만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전인교육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많다고 비판하는 교수들도 있었다.

그러나 지난 70년대에 신설된 연륜이 짧은 대학들은 강의실 여건이 상대적으로 양호하다.

세미나 과목에서는 학기 말에 「블록 세미나」라 하여 대학에서 관리하는 교외 세미나실에서 -여기에는 세면장, 침대, 식당이 다 갖추어져 있다- 이박 삼일 정도 담당교수와 숙식을 같이 하면서 각자 학생들이 맡아 준비해 온 테마별로 발표를 하고 토론을 한다.

법과대학에는 세미나실 형태의 법대 도서실이 분야별로 잘 정돈되어 있다.

세미나실에는 분야별 저널이 거의 완비되어 있다. 교과서나 주석서는 같은 종류의 책을 열 권 혹은 다섯 권씩 비치해두고 있다. 세미나실에 있는 건물 지하실에는 열 두 대의 복사기가 설치되어 있고, 세미나실마다 복사기가 하나씩 비치되어 있다.

 단과대학 세미나실에 없는 도서나 자료는 중앙도서관의 원격 대출 시스템을 통해 주문할 수 있다. 뮌스터가 속해 있는 노트라인 베스트팔렌 주에 있는 대학도서관자료는 상호교류가 가능하다. 일주일에서 이주일 정도면 자료를 받아 볼 수 있다. 따라서 자료를 구하지 못하여 연구를 하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생각하기 어렵다.

 세미나실이 잘 정비되어 있기 때문에 심도 있는 교육과 연구가 가능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이런 연유로 법대 교수들의 자택 서재에는 책들이 많지 않았다.


4.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독일에는 직업학교가 발달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김나지움(우리나라 인문계 고교에 해당)에 대해서만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4학년까지 기초교육이 끝나면 인문계와 실업계로 진로가 정해진다.

김나지움교육은 5학년부터 13학년까지이다. 13학년 때에는 ������아비투어(Abitur : 고등학교 졸업시험)를 치른다.

학교는 오전 8시에 시작된다. 김나지움 9학년까지는 대체로 오후 1시 전후하여 수업이 끝난다. 김나지움 10학년부터는 아비투어를 준비하기 위하여 오후 여섯시까지 학교에 남아서 공부를 한다고 한다. 독일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자유시간이 많다.

그 시간에 각자가 여가선용과 취미생활을 한다. 취미로 익힌 수영이나 악기연주가 전문가수준 못지 않다.

 학교에서는 근본원리중심으로 철저하게 기초정지작업에 중점을 둔다. 토론식 수업을 한다. 우리나라 학생들처럼 자기 의사를 표현하지 않고 젊잖게 있으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4학년 말에 행해지는 학교 선택에서 담임선생의 의견이 절대적이다. 이십 오륙 명 정도의 학생을 세세히 관찰하고 지도를 하기 때문이다.

영어도 초등학교 때부터 가르치지만 우리처럼 한꺼번에 몽땅 가르쳐주려는 과욕을 부리지 않고 실용적인 한 두 문장을 가지고 몇 주씩이나 보낸다. 살아있는 교육을 받기 때문에 독일인들은 일상적인 생활영어는 모두 잘 한다. 다만 동독지역 사람들은 영어를 못한다.

 초등학교에서 ‘아베체데’를 가르치더라도 바로 가르치지 않고 우선 곡선 그리기, 나비 그리기 등을 통하여 자연스레 독일어 낱자를 익히도록 유도한다.


5. 독일의 거리


 독일의 거리는 잘 다듬어져 있다.

비가 자주 오는 습한 날씨 때문에-나무에 이끼가 끼어 나무껍질 색깔이 푸르스름할 정도이다- 도처에 숲과 잔디밭과 산책로가 잘 만들어져 있었다. 잔디밭에는 까마귀와 산토끼들이 많이 노닐고 있었다. 처음에는 집토끼로 착각하였다. 아파트나 단독주택 주변 잔디밭에서도 산토끼들이 나돌아 다녔기 때문이었다.

 시내 중심가 상가에는 천정에 화분을 매달아 시가지를 꽃으로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가로변 건물은 독일의 옛 건축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법률로 건물외관을 변경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 군에 해당되는 조그만 도시에도 박물관이 모두 있었다. 옛것을 철저하게 보존하는 독일인이 부러웠다.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초가지붕을 모두 스레트지붕으로 뜯어고쳐 버린 우리나라하고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기독교 문화권이기 때문에 교회에 관련된 동상이나 기념물이 많았다.

시내 중심가 간선도로에는 돌조각을 하나 하나 세워 만든 모자이크 도로가 많았다. 자동차 과속방지도 하고 길바닥을 꾸미기 위해서이다. 내가 생활했던 뮌스터는 독일에서 자전거도로가 제일 잘 정비된 도시라고 한다. 자전거 도로는 차도 옆에 일 미터 폭으로 붉은 벽돌을 깔아 만들어져 있었다. 남녀노소, 연령고하를 막론하고 자전거를 즐겨 타고 다녔다.

뮌스터시내에 있는 돔 교회 광장 앞에서는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 오후 1시까지 재래식 장이 섰다. 독일 농부들이 채소류나 과일류 등 농산물을 가져와서 판다. 금요일에는 무공해 농산물만 판다. 이 날 파는 농산물은 값이 더 비싸다. 많은 사람들이 구경도 할 겸 여기로 몰려든다. 거리의 악사들이 나와 흥겹게 음악도 연주하고 돈도 번다.

독일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멋쟁이들이다. 이들은 연금생활자들인데다 말년에는 자녀들에게 돈 들어갈 일이 없기 때문이다. 젊은 학생들은 돈도 없을 뿐만 아니라 공부하는 신분이기 때문에 검소하게 치장을 하고 다닌다. 머리모양이나 신발 등에서 남녀구별이 없다.

머리를 땋은 남학생이나 젊은이도 있고 반대로 머리를 짧게 깎은 젊은 여성이나 아주머니도 있다. 남녀의 거리감이나 차이감이 거의 없다. 에이즈 확산이나 동성연애자가 서양에 많은 것도 여기에 한 원인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6. 독일의 가정, 애완동물


독일은 지금 핵가족 제도이다. 1930년대까지는 독일에도 대가족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젊은 부부들은 많은 자녀를 두려고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한, 두 명의 자녀를 둘 뿐이다.

이 정도 자녀마저도 갖지 않으려는 젊은 부부가 늘어나기 때문에 독일정부는 최근에 ‘킨더겔트(Kindergeld : 자녀양육지원금)’를 증액하여 많은 수의 자녀출산을 유도하고 있다.

지금 독일의 인구는 어린이 숫자는 줄고 노인층은 상대적으로 늘어나는 역 피라미드형이라고 한다.

법률상 어른이 되는 18세가 되면 자녀들은 대체로 부모 곁을 떠나 자립생활을 한다. 철저하게 개인 위주로 교육을 하고, 교육을 받기 때문에 자기 주장도 강하고 모든 것을 자기 책임 하에 결정한다. 우리식의 ‘우리’라는 개념이 희박하다.

자녀를 늦게 두더라도 크게 걱정을 하지 않는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18세가 되면 자리하여 부모 곁을 떠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 분위기여서 그런지 몰라도 유모차에 누워있는 어린 아이들이 한결 같이 의젓하게 보인다.

독일가정에서는 개나 고양이 등 애완동물을 대부분 기른다. 이들은 독일인들의 친구이다.

방에서 사람과 같이 거쳐하기 때문에 냄새가 난다. 자녀들이 뻗선데다가 대체로 말년에는 부부만이 살기 때문에 말없고, 대꾸할 줄 모르는 동물을 선호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슈퍼마켓에 가면 애완동물을 위한 먹이가 통조림 등으로 잘 가공되어 있다. 애완동물 사육에 필요한 이발 기계 등 도구도 잘 발달되어 있다.

독일인들은 아침에는 빵을 먹는다. 빵 종류도 굉장히 많다.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담백하고 살짝 눌린 누룽지 맛이 나는 ‘브뢰첸’이 입맛에 어울린다.

브뢰첸에 마가린이나 버터를 바르고 사이에 소시지 등을 끼워서 두, 세 개를 먹고 찐 달걀 한 개를 먹으면 속이 든든하다. 나는 아침에는 빵(한 개에 보통 4 페니히)을 먹고 점심 때에는 멘자(Mensa : 독일대학 구내 학생식당)에서 기름에 튀긴 돼지고기요리와 폼프릿(새우깡 모양으로 감자를 썰어 기름에 튀긴 것)을 주로 사먹었다.

 가끔 밖에 나가 야채류를 주로 내놓는 식당에 가서 사먹기도 하고 -여기 사람들은 주로 육식을 하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식당이 인기가 좋고 값도 비싸다- 빵집에서 겸업하는 간이 스넥 코너에서 삶은 돼지갈비를 사먹기도 하였다. 흐린 날이 많고 비가 많이 오기 때문에 저기압이다. 일 년 중 5월이 가장 맑은 날이 많다고 한다. 나는 독일에 와서 저혈압이 되었다(물론 지금은 정상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거의 마시지 않던 커피를 의식적으로 마시기 시작하였다.

나는 다행히도 ‘이체’라는 독일 고속열자로 한 시간 사십분 정도 걸리는 곳에 사돈이 살고 있어서 김치는 한 달에 한 번씩 얻어다 먹었다. 가끔 한국에서 가져온 된장과 멸치로 국도 끓여서 먹었다. 그때는 속이 개운하고 무얼 먹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빨래는 일주일에 한 번씩 모아서 지하실에 있는 세탁기와 건조기로 빨아서 말려 입었다. 양말과 러닝 셔츠 등은 모두 일곱 개씩 준비하여 사용하였다,

독일 사람들은 식사 때 소리를 내지 않는다. 소리를 내고 음식을 먹는다든지 국물을 훌쩍 마시면 실례가 된다고 한다. 콜호서 교수 댁과 다른 독일인 집에서 식사를 할 때 이 점이 상당히 고역이었다. 그러나 우리 식탁예절과 달리 독일인들은 식사 시에 식탁에서 코를 풀어도 실례가 되지 않는다.


7. 여행


지난 해 말에 방문한 가족과 함께 겨울방학 동안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지역을 여행하였다.

처음에는 독일거리 자체 만해도 신기하게 느껴졌지만 막상 로마를 구경하고 나니까 독일이나 프랑스에 널려져 있는 건물이나 조각, 도로 형태가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문화의 근원이 그리스 ․ 로마문화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하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여행사에서 여행경로를 안내할 때 로마를 제일 마지막 방문지로 정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가족과 함께 우선 파리를 여행하지 위해서 반카드(Bahn Card : 기차요금 50% 할인 카드)를 가지고 구입한 파리행 기차표를 가지고 퀼른까지 간 다음 거기에서 파리행 기차를 갈아탔다. 파리 북부역에서 내렸다. 역구조가 복잡하여 프랑스어와 영어로 물어보았다. 한 중년신사가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지하에서 윗층 까지는 올라왔으나 택시승강장은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다시 대학생처럼 보이는 젊은 청년에게 택시 승강장을 물어보니 친절하게 지하 택시 승강장까지 안내해주었다. 여기서는 독일과 달리 트렁크에 실은 짐까지 개수로 계산하여 택시요금을 받았다.

 다음 날은 몽마르뜨 언덕아래에 있는 한국인 호텔 주인의 설명을 듣고 전철로 파리 시내 여행을 다녔다. 루브르박물관, 노트르담 사원, 개선문 등을 구경하였다.

루브르박물관은 규모가 정말 방대하였다. 며칠 짬을 내어 차분하게 구경해야 제대로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에는 이집트 등의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일부는 기증도 받았겠지만 나폴레옹시절에 전리품으로 가져온 것도 많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나뭇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겨울 거리여서 그런지 시가지가 아름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파리와 로마가 독일도시 분위기와 다른 점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우선 눈에 바로 들어오는 것은 독일의 도시는 안정되어 있고 거리질서가 잘 잡혀있다는 점일 것이다.

예를 들면 파리나 로마의 경우 교통신호등이 빨간 불일 때에도 운전자나 보행자가 서로 알아서 오고 간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는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지면 차가 없어도 보행자가 없어도 파란 불로 바뀔 때까지 기다린다. 어렸을 때부터 규범적인 생활태도가 몸에 배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8. 마무리


겨울방학 때 나를 찾아온 가족을 한국으로 떠나보낸 직후에는 마음이 허전하였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새해가 바뀌어 벌써 2월이라 생각하니 남은 시간이 너무 아깝고 귀하였다.

 남은 기간을 잘 마무리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아쉬운 점들을 확인하고 보충하고자 애를 썼다. 연구원들이나 도서관 직원들 또한 친절하게 잘 도와주었다. 틈나는 대로 나를 도와준 독일인 교수들과 만나 식사도 하였다.

독일에서도 학기말 직전에 학장 초청 하에 저녁회식을 하는 데 부부와 함께 하는 것이 이채로웠다. 콜호서 교수와 나는 호흡이 맞아 즐겁게 식사도 하고 맥주도 마셨다. 회식 후 나를 기숙사까지 데려다 주면서 「당신이 정말 내 마음에 든다.」고 하면서 잘 자라는 인사말을 한 후 헤어졌다. 일 년여 가까이 한국인 교수로서 생활하면서 결과적으로 좋은 인상을 주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여서 매우 기뻤다.

7월 하순 경에는 독일 민사특별법상의 문제를 중심으로 독일어로 쓴 논문을 가지고 만프레드와 토론하면서 보완하였다. 보완 마무리된 논문을 콜호서 교수에게 한 부 주었다.

며칠 뒤 손수 읽어보고 출판해주려고 하는데 어떠냐고 물어 와서 좋다고 하였다.

 휴가 간 여판사 프라우 드루우번이 오면 곧바로 작업을 시켜 출판하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법대교수 26명에게도 배부하고 내가 써준 독일 법과 대학 교수와 변호사에게도 보내주마고 하였다. 나에게도 우송해주기로 약속하였다. 뮌스터에서 가까운 오스나브뤽 대학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하는 대학 후배가 나에게 한턱내라고 하였다. 자존심 강한 독일인 교수가 흔쾌히 비용을 들여가면서까지 출판 제의를 하는 것은 거의 없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한국에 보낼 짐들을 정리하여 항공편과 선편으로 부쳤다. 마음이 홀가분하였다.

 초청교수를 비롯하여 신세진 사람들에게 저녁을 대접하였다. 만프레드를 비롯한 독일인 친구들과 대학 후배 부부가 환송연을 베풀어주었다. 만프레드는 나와 만난 것이 운명적이라고 말하였다. 변호사개업을 하여 돈을 많이 벌면 나를 꼭 찾아보고 싶다고 하였다. 이별을 아쉬워하며 나에게 뮌스터를 소개한 책을 한 권 선물로 주었다.

 대학 후배 부부는 나에게 「교수님은 정말 적응을 참 잘하고 가신다.」고 이야기 하였다.

8월 중순과 하순 초반은 바쁘게 지나갔다.

 드디어 8월 25일 오후 4시경 뮌스터/오스나브뤽 공항에서 6시 20분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기숙사에서 여행용 가방을 들고 나서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후련하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하고, 고향 선배분과 오스나부뤽 후배 부부의 배웅을 받으며 6시 20분발 프랑크푸르트공항행 루프트한자 비행기를 탔다.

한 시간 뒤인 7시 20분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하여 짐을 찾아 부친 후 밤 9시 5분 대한항공 비행기에 올라탔다. 이제 새로운 시작이라는 생각이 나의 뇌리를 순간 스쳐갔다.

 8월 25일 오후 5시경에 김포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제자 이금옥 군이 마중을 나왔다.

나의 아내가 미리 부쳐준 서울-여수발 항공권으로 사랑하는 가족이 기다리는 보금자리 순천집을 그리며 여수행 비행기를 탔다.

 여수공항 대합실에는 그동안 의젓하게 자란 두 아들과 사랑하는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가족의 소중함과 나를 음양으로 도와준 모든 이의 소중함을 새삼스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1995.12.).


1) 이 글은 제3호 「향림법천」,순천대학교 법학과 편집위원회,1995.12.111면~118면에 실린 글을 법학과 인턴조교 박아람 양이 2009.9.8. 타이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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