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점박이배

2010.06.02 08:35

관리자 조회 수:9536 추천:1

 지난 2월 9일 저녁 서울에서 나를 만나러 내려온 손님들에게 구도심 다심정가에서 저녁식사 대접을 하고 밤 8시 30분 넘어 귀가하고 있는 데 처에게서 전화가 왔다. "노안 아버지가 위독하여 병원에 입원하셨다"고 한다. 한 10분 뒤에 처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는 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처도 직장에서 회식이 있어 광양에 있는 식당에 갔다가 급히 귀가하였다. 집에서 대강 장례식장에서 입을 옷가지 등을 챙긴 후 광주 첨단지구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갔다. 오늘 저녁따라 보성강 주변 도로에 안개가 잔뜩 끼었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장인어른께서 돌아가신 것은 현실이었다. 어떤 이는 말한다. "장기간 아퍼서 누워 계시지 않고, 사실만큼 사시다가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서운한 점도 있지만, 본인이나 가족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한편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날 오전 11시 30분경에 노안에 사시는, 82세 되신 장인 어른과 통화까지 했는 데 도통 믿기지 않는다. 얼마 전에 가슴이 답답하다고 하셔셔 처남하고 광주에 있는 내과 병원에 가서 사진도 찍고 약도 구해 오셨다고 한다. 그런데 돌아가신 당일 날 오후에 처가에 찾아온 손녀 사위를 위해 몸채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대문을 열어주고 걸어오시다가 몸채 앞 현관에서 덥석 주저 앉으시면서 통증이 올 때 비상 복용하라고 병원에서 처방해준 심장 약을 찾으셨다고 한다. 내가 오전에 안부 전화드릴 때 장인 어른께서는 "내 몸은 내가 아네. 다시 진찰도 하고, 검사도 해보아야 할 것 같으면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야지."하시면서 크게 호탕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선하다. 나주원예 농협 공판장으로 처갓집 배를 실어날라다 주는 단골 운전기사에게 무슨 말씀 끝에 "내가 죽으면 어떠지" 하셨다고 한다. 장인 어른 본인께서는 죽음을 예감하셨는지 모르겠다. 참으로 허망하다.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죽을 때는 순서가 없다는 말이 맞는 말 같다.
 장인 어른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처갓집에 갑자기 공백상태가 생겨버렸다. 어느 누구도 그 자리를 메꾸기에는 역부족이다. 집안의 가장이시던 장인 어른 한 분이 돌아가시니 처갓집의 모든 질서가 무너지고 재편되기에 이르렀다. 더 이상 힘들고 농사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배 농사는 장모님 혼자서 짓기에는 너무 버겁고 힘든 일이다. 그렇다고 농사 경험도 없고, 다른 직업이 있는 처남이 배나무 과수원 농사일을 도맡아 하는 것도 무리이다. 그래서 과수원은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기로 하고, 장모님은 배나무 과수원 일에서 손을 떼시도록 하였다. 과수원을 보면 장인 어른도 생각나실 것이고, 과수원 일에 파묻히게 되면 너무 힘들기 때문에.
 장모님이 거주할 조그만 아파트를 광주에 마련해 드렸다. 그리고 장인 어른께서 남겨놓은 토지를 담보로 농협에서 역모기지론을 이용해 장모님이 다달이 생활비를 받을 수 있도록 해드렸다. 처남에게는 장모님이 돌아가시면 그때 남은 재산은 모두 처남이 인수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장인어른이 돌아가신 후 남겨진 문제들을 모두 정리정돈하였다.
 장인어른이 사시던 과수원집은 처남 가족이 들어와 살기로 하였다. 처남은 농사일이 전문이 아니므로 과수원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었다. 장모님이 가끔 과수원을 보시고는 마음에 들지 않으신 모양이다. 과수원을 빌린 사람이 배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한 모양이다. 그래서 아쉽지만, 배나무 과수원 농사문제에서도 깔끔하게 손을 떼시라고 말씀드렸다. 어차피 배나무과수원에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형편이므로 장인어른께서 정성들여 가꾼 배나무들이 잘못 관리되고, 가지치기가 잘못 되더라도 마음쓰지 마시라고. 이제는 배나무 과수원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마음 편하게 정리하도록 노력하시라고 말씀드렸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으시겠지만.
 홀로 와서 궁극에는 홀로 떠나는 것이지만, 태어나서 죽기 직전까지 쌓아놓은, 유형 무형의 모든 것을 홀가분하게 털고 가기는 정말 어려운 것 같다.
 평생을 넉넉하고 행복하게 살았든, 그러하지 못했든 궁극에는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떠날 수밖에 없는 삶의 이치를 미리 체득하고 산다면 막상 닥치는 죽음의 문턱에서 홀가분하게 떠나 또 다른 세상으로 여행할 수 있을 것 같다(201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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